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르하르트 리히터 (문단 편집) == 특징 == 리히터의 회화의 양식을 단일하게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며, 동시다발성과 분절성을 특징으로 한다. 리히터는 1960년대 초기에는 구상사진회화, 1966년 이후에는 극사실적인 풍경사진화 및 기하학적 추상회화, 1971~72년 사이엔 유명 사진인물화, 1977년 이후에는 추상회화와 정물화 등을 많이 제작하였다. 이러한 무양식성은 중성적, 익명적 이미지인 사진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회화구조와 깊이 관련된다(Michael Danoff). 리히터는 오브제 미술, 행위 미술 등 현대 실험미술의 열풍 속에서도 현대적 감각과 방법을 동원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리히터는 대상을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회화를 통해 순수한 실재세계를 드러내기를 추구했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개의 전체주의를 체험한 리히터는 이념 전쟁을 극도로 싫어했다. 정치 이념만이 아니라 예술 이념도 리히터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가 고정된 양식에 안착하기를 거부하고 끝없이 언어를 바꾸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예술에 하나의 양식을 강요하는 것은 그에게 히틀러, 스탈린이 하는 짓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특정 양식이 없는 것을 좋아한다. 사전, 사진, 자연 나와 내 그림들-왜냐하면 양식은 폭력이고, 나는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1962년 이후 리히터는 사진이미지에 인공적으로 붓질을 가해 그대로 회화로 재생산했다. 리히터는 회화와 달리 사진은 양식화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사진에는 양식도 없고, 구성도 없고, 판단도 없다. 사진은 대상을 회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한다. 카메라는 대상을 이해하지 않고, 그것들을 그냥 본다. 반면 손으로 그린 그림들은 일종의 시각적 종합이기에 현실을 왜곡시키고 특정한 종류의 양식화로 흘러간다. 그 결과 현실은 이미 알려진 것으로 상투화되고 정형화된다는 것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gerhard-richter.com/9127.jpg|width=100%]]}}}|| || '''{{{#fff , 1965}}}''' || 리히터가 사용한 사진 소재는 가족의 스냅사진, 작가가 직접 찍은 풍경사진, 그리고 인쇄매체로부터 취한 사진 등 다양하다. 리히터는 사진을 흐릿한 윤곽, 추상표현적 터치, 기하학적 구성 등을 통해 회화로 재가공했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사진이란 환영의 실재성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고, 예술에 있어서 진정성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나아가 리히터는 독일의 역사와 그 역사와 연관된 자신의 경험을 예술에 담는다. 한 예로 리히터는 자신의 친척의 초상사진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런데 그의 친척은 나치 장교였다고 한다. 리히터는 나치에 부역했던 자신의 친척 사진을 회화로 만듦으로서 '단란한 가족'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초상사진과 초상화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 우리 친척들은 착하다, 우리 사회는 올바르다, 우리 나라는 위대하다 같은 관념들.]에 의문을 느끼게 만든다. 리히터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리히터는 그 현실이 어느 하나의 그림 안에서 단 한번에 남김없이 포착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오직 남는 것은 결코 손으로 잡지 못한 채 현실에 접근하려는 끝없는 시도뿐이라고 본 것이다. 그 결과 리히터의 그림도 결코 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리히터는 수많은 예술들을 가지고 놀이를 하면서 현실을 안갯속에 감추고, 그런 리히터의 작품을 보는 관람자는 그 현실을 체감하지 못한다. 때문에 리히터는 1980년대의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예술)|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